아내와의 다툼
“올리브 오일을 왜 여기 놓았어?”
“왜? 거기 놓여있으면 문제라도 되나?”
“아니, 나는 그냥 왜 여기 놓았는지 묻고 있는 거지!”
“올리브 오일을 거기에 놓으면서 내가 어떤 의사결정이라도 했다고 생각해?”
사실 세상의 모든 문제나 사고는 대부분 사소한 것에서 발생한다. 말다툼의 시작도 근본적인 의견차이가 아닌 정말 아무것도 아닌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로 발생하게 되고, 주방에서 실수로 다치거나 하는 것도 정작 날카로운 칼로 무언가를 썰때가 아닌 무심코 종이 박스를 뜯다가 나도 모르게 모서리에 손을 베거나 할 경우가 더 많다. 항상 그렇지만 아내와의 말다툼에서 승자와 패자는 없다. 물론 다툼이 시작되고 서로의 언성이 높아가면서 서로의 옳고 그름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핏대를 올리지만 결국은 서로가 알아서 볼륨을 낮추고 그냥 넘어가고 잊어버리는 일이 일반적이다. 캐나다에 이민 와서 처음부터 가게를 함께 운영해 온 우리는 한시도 떨어져 있는 일이 드물다. 서로는 서로에게 고용자도 피고용자도 아닌 그저 가정과 가게를 무한책임으로 돌보는 주체이다. 남들은 부부가 허구한 날 붙어서 생활하면 얼마나 답답할까 생각하겠지만, 스몰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최소한의 단위를 깨뜨릴 별다른 수단이 없는 것이 현실이고 그런 전우애가 우리 부부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내 아내는 일본인이다. 아주 옛날 신혼살림을 처음 서울에서 시작했을 때에는 아내는 나름 어학당도 다니고 동네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도 주고받는 정도로 한국어를 꽤 잘했었지만 캐나다로 이민온 후 쓰임새가 줄면서 가끔씩 한국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할 때조차도 힘들어한다. 반면 연애시절부터 아내와 일본어로 소통을 해온 나는 아이들에게만은 한국어로 얘기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부국어가 아닌 모국어인 일본어가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되고 결국 우리 집에서의 모든 대화는 일본어가 되어왔다. 대부분의 시간을 아내와 함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나는 손님들과 영어로 소통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일본어로 이루어지다 보니 내 일본어 실력은 나날이 향상되어서 꿈조차도 일본어로 꾸는 상황이다.
일본어로의 의사소통은 웬만한 경우를 제외하면 불편하지 않지만 문제는 무언가가 뒤틀렸을 때 발생한다. 그냥 일상적인 대화로만 생활이 이어지면 좋겠지만 서로의 행동에 이해가 안 가는 사태가 가끔 벌어진다. 그것은 개인적인 취향일 수도 있고 굳이 문제의 원천을 따지자면 문화적으로 확연하게 다른 두 나라에서 자라오면서 별생각 없이 몸에 베인 각자의 습관일 수도 있다. 문제는 나를 이해 못 하는 아내에게 내 기분… 나아가서 내 문화적 습관에 대해 나의 행동에 대한 이해를 구할 때 도무지 나의 일본어 실력으로는 내 본심을 관철시키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다툼은 상대방의 마음을 못 읽으면서 발생하고 그 상황을 이해시키지 못하며 커지게 된다. 정확한 원인이 제공되고 거기에 따른 명백한 결과가 나온 상황을 가지고는 서로에게 시비를 거는 일은 없다. 예를 들어 목이 말라 냉장고 안에 있던 우유를 다 마셔버렸다던가, 아내 화장대 서랍 안에 있어야 할 손톱깎이를 내가 쓰고 깜빡 식탁 위에 올려놓거나 하는 일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원인과 결과가 확실한 서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어릴 때, 나는 가끔은 교육차원에서 엄하고 무서운 아빠의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는데, 아내는 그런 나의 행동에 전혀 동의해 주지 않았다. 아빠가 목소리를 높이면 엄마는 아이들에게 아빠의 노여움을 알리고 긴장하게 만들어야 아빠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아이들이 반성할 수 있을 텐데, 우리 집의 경우 그런 아빠의 모습을 용납해주지 않는다. 아내는 아이들의 편을 든다기보다는 상식적인 차원에서 그때그때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식이다. 자식교육에 있어서 가끔은 단호한 모습으로 아빠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나의 의도는 매번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위한 내 순수한(?) 의도와 그것을 이해 못 하는 아내와의 언쟁에서 나는 매번 지고 만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부부의 다툼은 심각하게 번지지 못한다. 그 가장 큰 이유가 내 일본어의 한계이다. 내가 어떤 일로 화가 나서 내 속에서 끓고 있는 답답함을 밖으로 표출하려 할 때 내 일본어 실력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논리적인 언어로 상대방을 굴복시키기는커녕 흥분한 내게서 나오는 일본어는 단어와 문법적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 벌어진다. 마차 조폭들이 쌍욕을 퍼부어대는 살벌한 상황에서 문법적으로 올바르기만 한 언어로 어설프게 대드는 꼴이랄까? 어쨌든, 그런 나의 언어적 한계는 싸움의 본질을 흐지부지하게 하고 그냥 웃고 마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되기가 일쑤이다. 나의 논리가 먹히지 않는 답답함에 억울할 때가 많지만 결론적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말 한마디에 몇천 량을 갚는다는 것처럼 내 언어가 상대방에게 전달될 때 그것은 상당한 가치를 내포하기도 하고 엄청난 폭력을 실어 나르기도 한다. 순간적인 노여움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텐데, 어쩌면 우리 부부는 언어장벽이라는 좋은 방패를 가지고 있다고 새삼스럽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