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부터 난 '간헐식 단식'을 해오고 있다. 먹었다 하면 살이 찌는 체질도 아니고 남들이 보기에 결코 비만스럽지도 않지만 어느 순간 나 자신이 그저 용납이 안되어 시작해본 이벤트이다. 식당을 운영하는 관계로 하루 세끼의 식사가 남들보다 한두 시간씩 뒤로 미루어지기 마련이다. 아침은 그렇다 치더라도 점심은 가게의 런치타임이 끝나고 청소가 마무리된 후에야 마주하게 되어 보통 오후 3시 정도가 되고, 저녁 역시 가게 영업이 끝나고 집에 와서 준비해서 먹으려면 밤 10시는 보통이고 어떨 때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배를 채우게 되는 때도 있다. 운동은 당연히 할 시간이 없는 핑계로 가득했고 그나마 '하루 종일 주방을 왔다 갔다 하며 계속 서있는 노동'을 '생활 속에 녹아있는 운동'이라고 위안하며 보내왔다. 흔히 23:1이니 16:8이니 하는 단식 요법을 시도해 봤으나 노동에 지친 육체가 견뎌내기에는 내가 내 육체에 너무 가혹한 고통을 주는 것 같아 포기했고, 우연히 시작하게 된 것이 점심식사를 끊는 방법이었다. 간헐적 단식의 왕도 차원에서는 어긋나지만 나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것 같았다. 방법은 간단하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점심영업이 끝난 후 가게 식구들이 점심을 먹을 때 나는 트레드밀에서 땀을 흘리며 배고픔을 잊는다. 저녁은 되도록 빨리 먹고 꾸벅꾸벅 졸면서도 밥 먹고 바로 눕는 행동만은 억제하다가 어느 정도 소화시키고 수면에 돌입하는 것이다. 효과는 대단했다.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이미 5Kg 정도가 빠지고 몇 달 후 내가 원하는 체중에 도달하더니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리바운드 없이, 무엇보다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지내고 있다. 라면에 대한 글을 쓴다면서 뜬금없는 다이어트 얘기를 이토록 장황하게 시작한 이유는 점심을 거르면서 나도 모르게 라면을 먹는 횟수가 줄었고, 그러다 보니 주말이나 휴일 아침에 가끔 즐기게 된 라면 타임이 전보다 훨씬 소중하게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누가 내게 '당신의 인생라면은?"이라고 묻는다면 난 서슴없이 중학교 시절 학교 앞 분식집에서 고약한 성격의 할머니가 끓여주셨던 라면을 떠올린다. 그 가게의 분위기가 어땠었는지, 테이블이 몇 개였는지, 라면 이외의 메뉴가 뭐가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가운데, 오로지 그 할머니의 얼굴과 말투, 그리고 그 라면의 맛이 생각난다. 할머니가 구사하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의 끝판왕이었다. 주어 동사 부사 어느 부분 하나 표준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그나마 나는 부모님이 부산 출신 이셔서 그 할머니의 '살벌한' 방언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그 당시 할머니와 무슨 대화 같은 대화를 한 것까지는 아니었고, 그저 라면의 양과 계란을 넣는지 여부, 또 넣는다면 많이 익히느냐, 혹은 떡을 추가로 넣느냐... 하는 정도의 주문의 확인이 고작이었고 그 짧은 대화(?)에서 할머니의 따뜻한 정감이 느껴져 왔었나 보다. 내 기억 속에 그 라면은 우선 그리 뜨겁지가 않았다. 그리고 면발은 상당히 두툼해서 불었다고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나와 친구들은 라면의 맛을 음미하기는커녕 그 인스턴트 향기가 작열하는 라면과 국물을 마치 무엇에 중독된 사람들처럼 허겁지겁 먹고 마셨다. 그 와중에 마주한 할머니는 주방 뒤편에서 인새의 모든 고뇌를 떠안은듯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몇십 년이 흐르고 그때 친구들과 사 먹었던 그 할머니의 그 라면이 점점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즘은 라면이 당기는 날이면 그 할머니 라면이 우선 떠오른다. 아니 그 할머니의 라면이 생각나면 라면이 당기게 된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이제 우리나라 국민의 인구수 만큼이나 라면의 레시피도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해도 믿을만한 세상이 되었다. 내가 한두 번 검색한 '라면 맛있게 끓이는 법' 때문인지 내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줄기차게 라면 레시피 영상을 퍼 날라준다. 찬물에 수프를 먼저 넣기, 면을 따로 삶기, 계란을 넣는 황금 타이밍, 액젓으로 감칠맛 올리기, 치즈 올리기, 우유 섞어 넣기, 고추기름으로 해장라면 끓이기, 땅콩버터로 탄탄라면 만들기... 등등 상상만 해도 군침도는 라면 레시피가 수억 개나 존재한다. 나 역시도 내 나름의 철학(?)으로 라면을 끓이고 여러 가지 레시피들을 참고해서 만들어 보기도 한다. 물론 다들 그 나름의 포인트가 있고 재료에도 설득력이 있다. 매번 새로운 스타일의 라면을 끓이고 나름 예쁜 그릇에 담아 잘 익은 김치와 함께 나만의 식사를 즐긴다. 그런데, 처음 한두 젓가락과 한두 스푼의 감동은 라면을 비워 갈 때쯤 되면 사라지고 다 먹은 후의 행복감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바로 이거다 하는 찬란한 빛이 나의 오감을 자극하지 못한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또다시 라면이 당길 때면 나는 어김없이 그 할머니의 라면을 소환한다. 인스턴트 향기 빵빵 풍기는 그 불은 면과 미지근한 국물을 말이다.
라면의 종주국은 사실 일본이다. 그 근원을 따지면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이미 라면은 일본의 국민음식이다. 물론 인스턴트 라면이 아닌 라멘 가게의 얘기이다. 이곳 캐나다에서도 일본 라멘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베트남 국숫집과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새로운 라멘집들이 문을 열고 있다. 나 역시 간장 베이스에 수육이 많이 얹힌 '쇼유 챠슈 라멘'을 즐겨 찾는다. 하지만 그 라면은 라멘이고 역시 내 기억의 중추에 소중히 보관된 라면은 그 할머니의 그 인스턴트인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라면도 그 할머니의 그것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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